주일 성서정과 묵상 (2022년 4월 24일/부활절 두 번째 주일)
2021년 4월 24일 주일
성서정과 복음서: 요한복음 20장 19-31절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날, 곧 주간의 첫날 저녁에.” 여기에서 그날이 어떤 날일까요? 네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날입니다. 그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임 자리에는 큰 화두가 있었습니다. 오늘 성서정과 바로 전 본문인 18절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먼저 마리아에게 나타나 자신의 모습을 보이셨고, 다른 이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전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에서 제자들은 열한 제자를 포함하여 예수를 가까이에서 따랐던 여러 사람들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그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상태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현이 나오죠.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마리아가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무서웠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은 그들이 바라고 꿈꾸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철저히 무너지는 것을 의미했고, 그 상실감이 너무 컸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던 부활에 대한 예언도, 또 마리아의 증언도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보다 본인들의 지도자인 예수가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과 신성모독 죄로 죽었기 때문에 그들도 똑같이 체포되어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더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말 한마디로 그들이 경험한 상실감과 절망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겠죠.
그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죠. “당신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Peace be with you.” 그리스어로는 “에이레네 휘민,” 그리고 아마도 예수님께서 사용하셨을 언어인 히브리어와 비슷한 아람어로는 “샬롬, 엘레이켐”이라고 하셨을 것 같습니다. 신약성서가 쓰인 그리스어 에이레네는 우리가 많이 듣는 히브리어인 ‘샬롬’이라는 말의 번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샬롬은 유대인들에게는 일상적인 인사인데요, 일상적인 인사이지만 가장 좋은 뜻을 가지고 있는 인사말이었습니다. 샬롬은 흠이 없다, 완벽하다는 뜻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샬롬은 전쟁과 고통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를 이야기하고, 경제적인 번영도 뜻합니다. 그리고 security 즉, 안전한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고민이 없는 평온한 심리, 또는 평온한 영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말이 바로 샬롬입니다. 그래서 샬롬은 육체적인, 정서적인, 그리고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기를 바라는 말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사랑과 은혜로 너의 모든 일을 맡아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의 표현인 것입니다.
죽었다 살아나셔서 제자들에게 처음 하신 말씀은 이 일상적이며 가장 풍성한 의미를 담고 있는 인사였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상실감, 막막함, 그리고 두려움, 의심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에게 이 인사를 건네셨죠. “지금 당신들의 마음을 다 이해합니다. 당신들은 충분히 잘 했습니다..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샬롬. 당신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부활의 주님은 따뜻하고 세심한 분이며 여전히 자신에 앞서 다른 이를 먼저 생각하는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활 신앙은 다른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부활신앙은 이런 예수님을 따라 일상에서, 그리고 특히 힘겨운 상황에서도 따뜻함과 세심함을 잃지 않고 자신 보다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이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같은 인사를 다시 한번 건넵니다. 21절에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죠.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저에게는 이 말씀이 다음과 같이 들립니다. “샬롬. 그럼 우리 다시 시작할까요?” 네, 당신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이어 받아 그 일이 계속되게 하라는 그의 부탁이자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자는 초대이죠. 부활의 주님은 따뜻하고 세심하게 우리를 감싸고 위로하며, 그와 동시에 그가 감당했던 일을 다시 한번 함께 시작하자고 초대하는 분입니다.
그리고 22절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많은 사람들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영향을 받아 교회의 시작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 의하면 성령강림 사건과 교회의 시작은 부활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오늘 새 날이 시작되고 바로 오늘이 성령이 나에게 임하는 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아닐까요? 나와 함께 다시 시작하자는 예수님의 초대장을 읽는 것이 바로 부활신앙이 아닐까요?
그리고 본문에는 마지막 평화의 인사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도마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부활하신 그날 저녁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인사를 건네실 때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날이 지나고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예수님을 봤다고 말했죠.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주님을 봤다고 말했을 때 다들 믿지 못했던 것처럼, 도마도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25절에 보면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라고 하는 말이 있고, 도마가 그들에게 한 말 “나는 내 눈으로 보고 만져보지 않는 이상 믿지 못하겠소”라는 말은 이들 사이에 어느 정도 텐션, 의견과 생각의 대립이 있었다고 느껴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예수님이 이들 앞에 다시 나타납니다. 그리고 다시 인사하십니다. “당신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 또한 일상적인 인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인사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제자들에게 던지는 예수님의 권면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Peace be among you.”
다시 시작하자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다시금 제자의 길로 초대하신 예수님, 하지만 그 길을 걷는 사람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름이 있고, 그 다름으로 인해 크고 작은 긴장과 불화도 생길 수 있습니다. 마치 교회처럼 말이죠. 이야기 속 도마와 다른 제자들도 그렇겠지만, 아까 말씀드렸듯, 예수님 이후에 복음을 선포했던 1세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과 세 번째 예수의 인사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의 하나 됨, 연합과 화해를 강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 사이에도 평화가 있기를.” 부활 신앙은 우리 사이에서, 공동체 안에서 연합과 화해를 이루는 노력과 실천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부활하신 주님의 샬롬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