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성서정과 묵상 (2023년 12월 10일/대림절 두 번째 주일)

 

성서정과 복음서: 마가복음 1장 1-8절

 

새로운 책을 펼쳐서 첫 번째 페이지, 첫 문장을 읽는 것은 무척 기대되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야기의 시작을 통해서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무엇을 만날지 모르기 때문이죠.

지난 2-3년간 읽었던 책들 중에 저에게 큰 울림과 도전을 준 책이 있습니다. 김응교 교수님이 쓴 윤동주 평전 ‘처럼’이라는 책입니다. 윤동주를 좋아하기 때문에 구입했고,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책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챕터에서 이런 첫 문장을 만났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장소가 있는지요?”

이 첫 문장을 읽고 한동안 책을 덮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 질문에 나름의 대답을 생각하게 되었죠.

이 문장은 두 가지 면에서 저에게 의미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내가 사랑하는 장소가 있는지, 그곳은 어디인지, 저로 하여금 잊었던 어떤 곳을 생각하고 떠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글의 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잘 쓰인 한 문장은 독자로 하여금 단순히 글을 읽는 행위가 아니라 그 글이 초대하는 세계로 이끄는 힘이 있다는 사실에 감동했습니다. 매주 설교를 쓰는 입장에서 글을 쓰는 자세 좋은 문장의 중요성 등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저에게 참 의미 있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 주어진 성서정과 본문이 마가복음의 첫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은 어떻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할까요?

1장 1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우리말 번역은 이렇게 문장으로 되어 있지만 그리스어로 쓰여 있는 텍스트는 핵심이 되는 단어만 나열합니다. 순서대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작,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의 아들”

마가복음을 기록한 저자가 고심해서 기록했을 첫 문장입니다. 시작,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의 아들.

시작을 뜻하는 아르케라는 단어를 1세기 유대인들이 읽었을 때 그들은 아마 창세기 1장 1절의 첫 단어인 시작 히브리어로 베레쉬트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것 같습니다. 세상의 시작을 기록한 창세기와 같이 마가복음의 저자도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선포한다고 생각하고 기대했겠죠. 그리고 그 새로운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그의 삶과 메시지가 새로운 질서가 되는 세상이죠. 그리스어로 휘우 때우, 하나님의 아들, 신의 아들이라는 칭호도 1세기 지중해 문화를 감안하면 굉장히 도발적인 말인데요, 왜냐면 오직 로마의 황제만 신의 아들이라는 호칭으로 부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은 과감하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역시 새로운 세계,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저자의 글은 굉장히 단호하고 빠릅니다. 단도직입적이죠. 첫 문장만 봐도 그렇죠. 예수의 족보 이야기로 시작해서 한참을 그의 근원에 대해 설명하려 한 마태복음과도 다르고, “우리 중에 이루어진 일들에 대해 천천히 설명해 보겠다는 누가복음과도 다릅니다.

마가복음은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말을 단호하고 명료하게 전합니다.

시작,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만드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 다른 메시지는 없다. 바로 지금 새 시대가 도래한다.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마가복음의 저자는 그의 글을 읽는 이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리고 2-8절 까지에는 다음과 같은 핵심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광야, 회개, 그리고 길.

광야는 화려한 도시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힘들고 어려운 연단의 장소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거칠고 힘든 공간만은 아닙니다. 광야는 고난과 시험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하죠.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도시로 가지 않고 그들의 방향을 바꾸어 광야로 나왔습니다.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저질렀던 크고 작은 잘못을 고백하고 뉘우치는 것만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란 내가 걸어가는 삶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방향으로 올바른 방향을 그 길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을 읽으며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황량한 벌판에 서 있습니다. 내 뒤로 도시에서 이어져 오던 잘 포장된 길이 끊겼습니다. 지금 그 길의 끝에서 지난날 내가 살아왔던 모습을 성찰하고, 나의 삶 가운데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모습도 떠올려봅니다. 내가 걸어온 길이 바른길이었는지 생각하고 내 앞의 광야를 바라봅니다.

내가 걸어가야 할 삶의 방향은 어디인지. 방향을 바꾸어야 하는지. 저는 지금 그 경계의 장소, 전환의 장소에 서 있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시간인 대림절 두 번째 주에 하나님께서는 마가복음의 첫 단락을 통해 우리에게 말합니다. 시작,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금 당신의 눈앞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올바른 방향을 선택하여 그 길로 걸어간다면 우리는 세례 요한과 같은 주님의 길을 예배하는 메신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지금도 새로운 세상이 오길 염원하는 광야를 살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그 길을 선택하고 걸어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함께 동참하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