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인디 열린 포럼: 저항, 순응, 혹은 절충 – 구약/예언서 다시 읽기
지난 9월 28일 베델교회 친교실에서 다섯 번째 인디 열린 포럼이 있었습니다.
베델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김백희 목사 (예명: 두둥아빠)가 이번 모임의 발제를 맡았습니다. 본인이 연구하고 있는 구약성서 예언서와 관련하여 ‘저항, 순응, 혹은 절충: 구약 예언서 다시 읽기’라는 제목의 주제 발표를 하고 참석자들 간의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인디 열린 포럼은 올해 1월부터 시작된 인디애나 지역의 친교 모임으로 한 달에 한 번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매월 셋째 금요일 저녁 7시) 모여 다양한 주제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토론도 재미있지만 공식 모임 이후의 뒤풀이 시간을 통해 진솔하게 서로의 삶을 나누는 시간이 매우 의미 있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모두에게 열린 모임이니 관심 있으신 분은 한 번 용기를 내어 오시면 좋습니다.
모임에 함께 참석했던 김재수 이웃 (예명: 꾀죄죄 분단장)의 이번 포럼에 관한 단상을 함께 올려봅니다.
사기를 당하고 있을까 – 김재수
깊은 배신감을 떨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지적 사기를 당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성서에 대한 기본적인 책을 몇 권 읽었습니다. 고든디피와 더글라스 스튜어트가 함께 쓴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마커스 보그의 ‘Reading the Bible Again First Time’, 리처드 프리드먼의 ‘Who Wrote the Bible’, 그리고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출판한 ‘함께 읽는 구약성서’와 ‘함께 읽는 신약성서’입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는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전혀 배우지 못한 내용으로 가득했습니다. 교회가 가르친 것은 지나치게 협소하거나 왜곡 투성이였습니다. 하나님을 전면에 내세운 대학에서 배운 것도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무지가 아니라 사기입니까.
역사성과 정치적 스토리를 보지 못하고, 어떻게든 신앙심을 고양하기 위한 우화와 위인전으로 읽습니다. 분배적 정의라는 공공성이 담긴 공동체적 메시지를 읽지 않고, 온통 개인의 필요를 채워주는 요술램프처럼 사용합니다. 복잡한 면모의 신과 인간사를 무시한 채, 지나치게 단순하고 배타적이며 교조적인 렌즈를 통해 성서를 읽습니다. QT와 제자훈련을 열심히 하며 자신들이 성서를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까.
지난 주, 인디열린포럼에서 발표한 두둥아빠는 성서학자들이 어떻게 성서를 읽는지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역사를 담은 사료로 읽고, 문학작품으로 읽고, 최근 더 많은 성서학자들이 신학적, 정황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읽고 있다고 말하며, 각각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제국 비평 측면에서 예언서를 읽는다는 의미에 대해서 더 자세히 이야기 했습니다. 제국과 식민지라는 이분법적 이해를 넘어서, 예언서에 담긴 친제국과 반제국 정서의 공존, 저항과 체념의 공존,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정체성이 부재한 현실의 공존 등을 지적합니다.
본인 논문의 주제인 하박국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주요 대형교회 설교자 몇 명이 평생에 걸쳐 한 설교 본문을 분석해 보니, 하박국은 손에 꼽을 만큼의 횟수입니다. 그것마저도 하박국 전체의 메시지인 사회적, 정치적 불의에 대한 분노, 슬픔, 저항, 심판과는 동떨어진, 그 중요도가 가장 작다고 할 수 있는 한 구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를 이용했습니다. 하박국을 이용한 노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둥아빠는 하박국을 인용한 찬송, ‘무화과 나무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으며’ 또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보다, 어쩌면 노래패 꽃다지의 노래, ‘바위처럼 살아가보자 모진 비바람이 몰아친대도 어떤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없는 바위처럼 살자꾸나’가 더 하박국의 메시지를 잘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